날이 차가웠다. 바야흐로 겨울이 되어 갤리는 그제야 옷장정리를 했다. , 여름, 가을. 세 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깊숙이 넣어두었다 꺼내진 두터운 외투들과 목도리에서는 아직도 오래된 나프탈렌 냄새가 남아있었다. 옷에 코를 박고 킁킁대는 갤리를 보던 뉴트는 피던 담배를 느릿하게 재떨이에 눌러 껐다. 비흡연자인 갤리는 옷에 담배 냄새가 배는 것을 항상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의 오랜 애인인 뉴트는 헤비스모커였다. '옷에서 나는 담배냄새조차 견디질 못하면서, 나랑 키스는 어떻게 해?' 뉴트가 언젠가 짐짓 짓궂게 물었을 때, 그는 뉴트가 말을 걸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장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잠깐 침묵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담배 냄새는 싫지만.' 그러나 불친절 하게도 그게 대답의 다였다. 뉴트는 불만스런 눈빛으로 뭉개진 문장의 끝을 재촉했고, 갤리는 꾹 다문 입술 대신 붉어진 귓불과 뒷목으로 대답했다. 담배 냄새는 싫지만, 그래도 네 키스는 좋으니까. 그 침묵의 대답을 기어코 읽어 낸 뉴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갤리는 애써 모른 척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얼굴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다. 뉴트는 그런 갤리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키스했고, 키스에서는 늘 그랬듯 쌉싸름한 담배 맛이 났다. '난 담배가 싫어.' 키스가 끝난 후 갤리가 중얼거렸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 위로 뉴트가 대답했다. 그래도 내 키스는 좋아하면서. 갤리는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마주 닿은 입술 새로 흘러 들었다. 긴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Peppermint Kiss

w.(@maze_BU)

 

 

세 계절의 나프탈렌 냄새는 조금씩 희미해졌고, 겨울은 성큼 다가와선 예의도 없이 세상에 눈보라를 뿌려댔다. 그러던 어느 날 갤리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망할 겨울. 오늘 아침 우산을 챙긴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출근길을 함께한 뉴트의 차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갤리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결국 검은 외투자락을 턱 끝까지 단단히 여몄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나프탈렌 특유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찔러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뉴트의 회사는 원래 갤리가 다니는 회사보다 퇴근시간도 늦고 야근도 잦았다. 흔치 않게도 어제와 그제 정시 퇴근이었으니 오늘은 야근일 것이 뻔했다. 일하고 있는 녀석에게 전화해서 우산을 내놓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남은 선택지는 이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고 가는 것 뿐이다. 하필이면 오늘 동료들도 다 먼저 퇴근하거나 외근이라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오늘은 눈 맞고 걸을 운명이었나 보다.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고 나니 멍청하게도 우산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시 한번 서류가방을 꼼꼼히 닫아 서류가 젖지 않게끔 조치한 뒤에야 갤리는 회사를 나섰다. 입에는 점심 시간에 식당에서 무심결에 집어왔던 박하사탕을 하나 문 채였다. 하필이면 박하사탕이라니.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입안까지 시리게 생겼다,는 생각은 빌딩을 나선 뒤 찬바람을 맞고서야 뒤늦게 들었다. 게다가 자신과 다르게 뉴트는 박하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양치부터 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뭐 한다고 이렇게 늦어.

…뉴트.

 


* * *

 


기다린 시간이 짧지 않음을 증명하듯 차 안은 틀어놓은 히터로 훈훈하게 덥혀져 있었다. 안전벨트를 찬 갤리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운전석에 앉아 다시 시동을 거는 뉴트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듯 웃는 입매나 재수없게 잘생긴 이목구비는 내가 아는 뉴트가 분명한데.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갤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회사는?' '잠깐 급한 일 있다고 나왔지. 다시 돌아갈 거야.' '…….' '기특하지?' '갑자기 왜 이래 징그럽게.' 가뜩이나 각지게 휜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하는 말에 뉴트가 엄지 손가락으로 갤리의 눈썹 끝을 꾹꾹 눌렀다. 오래된 버릇이었다. '인상 쓰면 일찍 늙는대.' '너야말로 죽을 때 된 거 아냐?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그냥 간만에 예쁜 짓 좀 하려고. 그런데 평가가 너무 박하네. 보람 없게.' 할 말이 궁해진 갤리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뉴트의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정말 뉴트의 가방이 없었다. 지난 봄 자신이 큰 마음을 먹고 사주었던 몽블랑의 검정색 서류가방이었다. 뉴트가 그걸 회사에 두고 퇴근했을 리 없었다. '진짜 나 때문에 중간에 나온 거라고?' '그래. 진짜라니까.' 어느새 출발 한 차는 익숙한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뉴트의 옆모습을 흘끗 거리던 갤리는 결국 민망함에 큼큼 헛기침을 했다. 실컷 의심하다 이제 와 선뜻 고맙다는 말을 하기란, 오래된 연인이라서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참을 침묵하자 뉴트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네 사과는 잘 들었어.' 운전하느라 정면만 보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알아 챈 것인지, 귀신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캐치해 정곡을 찔러오는 뉴트의 말에 갤리가 허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어째서 매번 이렇게도 파악 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들어주니 참으로 고맙다 새끼야.' '고마우면 선물 줘.' '…선물은 무슨 선물.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사탕."

"…사탕?"

"너 지금 먹고 있는 거 말이야."

"…이거 박하사탕이야. 너 안 좋아하잖아. 게다가 이거 하나 뿐이고."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갤리가 뉴트를 흘긋거렸다. 평소에 사탕같이 단 걸 즐길 줄 몰라,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갤리에게 '낭만을 모른다'며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듣던 녀석이 이제와 뜬금없이 그 재미없는 취향을 바꾸었을 리는 없었다. 그때 붉은 신호가 깜박거리며 차가 사거리에 멈추어 섰다. 퇴근길에 바쁜 차들이 빵빵거리며 제 갈 길을 찾아 달려갔다. 툭툭 운전대에 올려져 있던 뉴트의 손가락이 깜박이는 신호의 박자에 맞추어 움직였다. 난잡하게 세계를 구성하는 소음들이 차창 밖으로 요란하게 굴러다녔다. 한 겹 가로막혀 들려오는 소리들은 마치 다른 세상의 것인 듯 둔탁하면서도 날카롭다. 문득 뉴트의 시선이 갤리의 눈동자로 향했다. 뉴트를 보고 있던 갤리와 마주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느닷없이 부딪힌 눈빛에 갤리가 뭐라 제대로 반응을 하기도 전이었다. 순식간에 고개를 기울인 뉴트가 갤리의 시야에 가득 찼다. 보드라운 금발이 이마에 스치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창 너머의 소음이, 불빛들이, 온 세상이 느릿하게 기울어진다. 서로 마주 뭉개진 코끝이 마모될 듯 아리다. 갤리는 눈을 감았다. 치열을 훑고 입안을 샅샅이 훑는 뉴트에게서는 늘 그렇듯이 담배 맛이 났다. 조금 메마른 혀가 까칠하게 얽어지고 씁쓸한 맛의 타액이 질척하게 섞여 들었다. 갤리는 팔을 들어 뉴트의 목 뒤로 감았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입술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더해져만 갔다. 갤리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를 꽉 틀어쥔 뉴트의 손아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두 사람의 키스는 오래지 않아 멈추었다. 영원 같던 침묵이 깨어지며 뉴트로 인해 쓰러져 낡아가던 세계가 다시 순식간에 소음으로 가득 찼다. 갤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뉴트를 보고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내 사탕…! 먹고 싶으면 한 봉지 사면 될걸 치사하게 먹던걸 뺏어가냐? 그리고 너 박하사탕 안 좋아하잖아."

 

신호가 바뀌며 뉴트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터무니없이 담담한 얼굴과 그 와중에도 열심히 오물거리는 입술에 갤리는 왜인지 분한 심정이 되었다. 뭐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뺏어간 거냐고. 어이없는 마음에 빤히 노려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뉴트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저를 잘 알듯이 굴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제 시선을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평소라면 벌써 내가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양 잘난 체 하며 알아서 대답해야 맞는 거 아닌가? …얘 왜 이래? 그렇지만 뉴트와의 관계에서 오랜 시간 늘 그러했듯이 갤리는 뉴트의 침묵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저 초능력자 같은 녀석이나 하는 거지. 결국 홀로 답답함에 몸부림치던 갤리가 다시 답을 재촉하려던 참이었다. 그의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들려온 것은.

 

". 박하사탕 안 좋아해."

"…그런데 왜."

"박하 사탕은 싫지만."

"싫지만?"

"……."

 

정면을 응시하던 뉴트의 시선이 흘긋 제게 돌아오는 것을 눈치 챈 갤리가, 그 침묵 속에 숨겨진 대답을 찾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 …아아.

 

"네 키스는 좋으니까."

"……망할 자식."

"박하사탕도 뭐, 썩 나쁘지 않네."

"그래도 난 담배가 싫어."

"괜찮아. 내 키스는 좋아하잖아."

 

그렇지? 하고 눈동자만 굴려 저를 보고 색 웃는 얼굴이 퍽 얄미워서, 이윽고 다시금 차가 멈추어 섰을 때. 창에 비쳐오는 붉은 신호등 빛, 옹알옹알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잡음들. 너 이외의 모든 것이 기울어져간다. 그리고 선명하게도 들려오는 네 낮은 숨소리, 손을 뻗어 반듯하게 다려진 네 와이셔츠를 틀어쥐자 바스락 구겨지는 얇은 천, 그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 부드러운 네 입술. 옅게 끼쳐오는 담배와 나프탈렌 향기. 그리고 이어진 우리의 키스는, 이제 박하향이 났다.



' > -메이즈러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트민호 : Your funeral +BGM  (0) 2015.03.29
뉴트민호 : Alive +BGM  (0) 2015.01.21
뉴트민호 : Liebestraume +BGM  (0) 2014.12.31
토민호 : 쓰다만거 +비공개  (0) 2014.12.30
토민호 : 눈 +전력60분  (0) 2014.12.30
Posted in : 글/-메이즈러너 at 2015. 1. 2. 11:10
Currently comments want to say something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