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liebe_duck)님의 민른온 신간 <'The hours>에 드린 축전입니다.

본 책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함을 밝힙니다.

* * *

오후 네 시

-(@maze_BU)

 

 

 여우가 말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여우의 털은 윤기 나는 모래색이었다. 윤기 나는 모래색, 이라는 것이 이상한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책 속의 어린왕자는 모래는 메말라야 한다는 어른들의 지루한 공식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임에 분명했다. 여우의 눈은 새카맣고 반짝였다. 꼬리는 길고 탐스러웠다. 귀는 그 끄트머리가 쫑긋하면서도 도톰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여우가 말했다. 이윽고 여우는 어린왕자의 친구가 되었다.

 

* * *

 

 박민호는 고개를 들어 습관처럼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초침이 똑딱똑딱 흘러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무음시계로 바꾸어볼까 고민했던 때도 있었더랬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고민 따위는 늘 그렇듯 시간에 잠겨 버리기 마련이었다. 늘 이것만 마저 하고, 저것만 마저 하고, 하며 미루다보니 어느새 저 초침소리마저도 이 방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기분이라 이젠 저 소리마저도 없으면 허전하겠지, 싶어 그냥 두기로 마음먹은 것이 한 달쯤 전이다. 그 말인 즉 캘리포니아에 살던 프리랜서 박민호가 뉴욕시티 교외의 파란지붕 집으로 이사 온 지가 벌써 한 달 하고도 반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규칙한 수입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다. 그러던 그가 시내와는 거리가 상당하다 하더라도 어쨌건 뉴욕의 근교로까지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일 때문이었다.

 틈틈이 업로드 해놓았던 개인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했다며 두 달 전 초봄의 어느 날 걸려온 전화가 그 시작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든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큰 출판사로부터 온 전화였고, 본론만 말하자면 그네들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100프로젝트의 삽화를 전적으로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물론 거절한다면 바보였다. 수락한다면 앞으로 몇 년 정도는 지속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을 터였고, 운이 좋다면 다른 책의 삽화까지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것에 대한 결정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차피 그의 부모님은 저 먼 한국 땅에 있었고, 서로 죽고 못 사는 애인 같은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출판사의 도움으로 적당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사 전날 친구들과는 밤새 낄낄대며 이별주를 마셨다. 박민호는 그렇게 낯선 곳으로 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맡은 동화책이 바로 생텍쥐베리의 <The little prince>이었다.

 시계의 초침은 막 89의 사이를 걷고 있던 참이다. 분침은 1011 11에 조금 더 치우치게, 그리고 시침은 3의 정수리쯤에서 멈추어 있었다. 간단히 요악하자면 곧 세시였다. 민호는 고개를 내려 종이 위에 그려진 금발머리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삐죽삐죽 헝클어진 머리칼과 녹색의 코트, 금색의 스카프를 맨. 다른 별에서 온 어리고 순수한 왕자님. 그러나 제 손 안에서 탄생한 소년은 자신이 보기에 왕자는 커녕 어느 시골의 촌스런 소년처럼 보였다. 여기 불그레한 뺨에 주근깨만 찍어주면 완벽하겠군. 민호가 중얼거리며 창밖을 힐끗거렸다. 누군가에게는 오만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썩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의 그림체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따라하지 못하는 독특한 구석들이 있었고, 출판사의 담당자도 바로 그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러나 유난히 이 어린왕자의 모습만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왜일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도, 상자속의 양이나 게으름뱅이별의 바오밥나무도 별달리 고칠만한 곳이 없는데 자꾸만 어린왕자만이 신경이 쓰였다. 어린왕자에게 유난을 떠는 민호를 찾아온 담당자도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않은가. 민호는 신경질적으로 펜대를 집어던졌다. 책상위로 펜이 도르륵 굴렀다.

 아니, 사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민호는 다시 흘끗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지나지 않아 이제 겨우 3시를 막 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 사람 때문이야. 민호가 투덜거렸다. 네 시의 그 어린왕자, 그 사람 때문이라고.

 

* * *

 

 그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정말로, 우연이랄 수밖에 없었다. 하필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 그 사람이라니. 아니, 그는 그때 확실히 눈에 띄는 모양새이긴 했다. 박민호는 그날 첫 번째 어린왕자를 그리고 있던 참이었다. '민호씨만의 어린왕자를 그려주세요.'라니. 원래 제일 어려운 주문이 '아무거나', '네 맘대로' 아니었던가.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벌써 네 시였다. 아무것도 완성된 것은 없었는데 시간만 주구장창 흐르고 있었다. 답답함에 괜스레 창밖을 내다보았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는 햇살에 반사되는 하얀 빛덩이를 발견했다. 자세히 바라보니 금빛이었다. 그랬다.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단 하나만의 이유로 그가 제게 특별해진 것은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의 평범한 옷차림을 한 남자는 손에 곱게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소중하다는 듯, 두 손으로 꼭 쥐고서. 어이없겠지만 본디 영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금발의, 장미꽃 한 송이를 든 남자. 민호는 멍하니 남자의 옆모습을 응시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5분 뒤 종이 위에는 담당자가 그렇게도 말하던 '민호씨만의 어린왕자'가 빙긋 웃고 있었다.

 

 그 날부터였을 것이다. 턱을 괸 채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샌가 저는 창밖을 보고 있는 일이 많았다. 주인공인 어린왕자가 구체적으로 결정되자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반대로 그는 정신을 놓고 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나마 제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그 '어린왕자'가 매일 4시에 제 창문 앞의 거리를 지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부터였다. 동화 속 여우의 말을 빌리자면,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언제 너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인거라고 민호는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는 습관처럼 3시쯤부터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민호는 '어린왕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알아갔다. 남자는 정말 늘 4시가 되면 그 근처를 지났다. 남자는 이어폰을 자주 끼고 있었고, 어떤 날은 종종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편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또 남자는 종종 꽃을 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프리지아, 어떤 날은 하얀 안개꽃, 또 어떤 날은 새파란 수국. 그러나 역시 가장 자주 들고 있는 꽃은 장미였다. 여자 친구에게 주는 걸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날부터 그는 이전처럼 어린왕자를 잘 그릴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은 동화 속 여우의 말대로 그에게 길들여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린왕자와 같은 금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황금색 밀을 보고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밀밭을 일렁이며 지나가는 바람소리조차도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여우가 말하던 길들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정일 수도 있었고, 사랑일수도 있었다. 민호는 자신은 어떤 쪽으로 '길들여져 버린'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아니, 모든 것이 변명이었다. ''가 궁금했다.

 

* * *

 

 영감이 그러하듯 기회나 행운 또한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디밀어지기 마련이었다. '꽃을 보냈어요.' 뜬금없이 아침나절부터 전화를 한 출판사의 담당자가 그렇게 말했다. 민호는 예? 하고 반문했다. '그래도 첫 마감이니까, 축하의 의미랄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 오늘 3시 쯤 갈 거예요.' 꽃이라니. -- 민호는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새 친해진 담당자, 트리사는 4살배기 아이가 있는 30대 중반의 커리어우먼이었고, 자신보다 어린 민호를 이리저리 놀리기 좋아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제 남동생과 비슷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놀리기 좋은 성격이라는 거죠.' 그 말에 민호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이번 일은 그녀의 장난질임에 틀림없었다. 다 큰 남자한테 꽃이라니, 보나마나 부끄럽게 색색 화려한 꽃다발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하여튼 쓸데없는 일을. 그 돈으로 고료나 올려줄 것이지. 그는 혀를 끌끌 찼다.

 그녀가 보냈다는 '첫 마감기념' 꽃다발은 네 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그리고 민호는 그 새 꽃에 대한 이야기는 잊어버린 채 여느 날처럼 창밖을 힐끗거리는 중이었다. 벌써 430분이었다. 평소 아무리 늦어도 45분을 넘지 않던 어린왕자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난 걸까. 오늘만 오지 않는 걸까, 아니면 이제 영원히 오지 않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모든 정신이 창밖의 풍경에만 팔려있는 채였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박민호씨? 꽃 배달 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놀란 그가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나가요!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열리는 현관. 민호는 눈앞에 드리워지는 붉은 장미꽃다발에 숨을 멈추었다. 아니, 장미 때문이 아니었다. 그 탐스런 꽃잎도, 매혹적인 향기 때문이 아니었다. '박민호씨 맞으십니까?' 그였다. 4시의 어린왕자.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물량이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포장에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금빛 머리카락. 밀밭을 닮은 그 머리카락. 여우가 말했다. '4시가 되면 나는 안절부절 못할지도 몰라. 넌 행복에 가득 한 내 모습을 보게 되겠지.' 남자가 건네주는 종이에는 <The little prince>라는 상호명이 적혀 있었다. 하하. 민호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마 담당자는 장미꽃보다도 이것으로 저를 놀래켜주려 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제게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남자는 오늘 평소 늘 그렇듯 청바지에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그럼.' '저기, 잠시 만요.' 민호는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민호는 짧게 웃었다.

"이름이 뭐에요?"

"?"

"이름이요."

"뉴트."

"뉴트반가워요, 뉴트씨. 저는 민호입니다."


* * *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나에게 너는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고, 나 역시 너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Posted in : 글/-메이즈러너 at 2015. 7. 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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